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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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실용주의 by 편린


첫 번째의 공통적인 특징은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모두 다윈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인간을 신에 의한 특별한 창조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동물과 마찬가지로 오랜 진화의 결과 살아남게 된 하나의 생물종으로 간주하는 것을 자연주의적 관점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반본질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화란 우연성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 역시 우연한 산물이다. 이러한 우연성에 대한 강조는 거의 모든 실용주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서 등장한다. 우리는 신의 섭리에 따라서 혹은 보편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모든 생물종의 일차적인 목표가 생존에 있듯이 인간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런 불확실한 우주 속에서 살아남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이 인간의 지식이다. 지식이란 인간이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도구이다. 모든 탐구의 목표는 따라서 영원불변한 초역사적이며 초시간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에 적응하여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두 번째 특징은 역사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방금 언급한 다윈적인 자연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역사주의자가 된다. 인간 자신이 역사적인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은 역사적인 우연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중략) 인간의 지식이 역사적인 우연성의 산물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자들이 탐구의 목표로 삼았던 영원불변의 진리, 궁극적이며 필연적인 진리의 개념을 획득하는 것이 탐구의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이 가진 세 번째 특징은 이들이 천상의 진리보다는 이 세상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속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라는 점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는 반형이상학, 반선험론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실용주의자들은 반플라톤주의적인 태도를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의 네 번째 특징은 이들이 모두 다원주의에 편들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면서 역사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입장을 택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옳은 최상의 대안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은 하나의 문제에 대해 한 가지 해결책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선책을 찾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차선책을 중용하게 생각한다. 이런 입장은 자칫하면 실용주의자들이 마치 상대주의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여기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의 이런 입장은 상대주의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다원주의라고 해야 한다. 상대주의란 어느 것도 절대적인 대안은 될 수 없으므로 모든 대안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 실용주의는 이런 주장은 올바른 입장이 아니라고 본다.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들은 분명히 더 나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초역사적인 절대적 기준을 우리가 제시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대안이 더 나은 대안인지조차 분가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뒤집어씌우는 혐의일 뿐이다. /p10-17

듀이는 실용주의적인 지식이 돈이 되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연관을 조망함으로써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교양이 필요하다. 편협하고 단편적인 지식을 기능적으로 습득해서는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없을 것이다. 전체를 조망하면서 구체적인 맥락에서 적확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가 실용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티의 경우에는 실용주의적 지식인상을 '문학적 지식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략) 로티가 '문학적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기존의 관습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지식인이다. 그는 그러한 가치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전통적인 지식인들이 했던 것처럼, 신이나 진리와 같은 초인간적인 어떤 것에 호소하기보다는 인간이 처한 역사적 한계와 우연성을 받아들이면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인물이다. (...중략) 로티는 지금까지의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철학적, 과학적 문화에 대한 대안적인 문화를 '문학적 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소설이나 시야말로 영원성이나 보편성에 기대지 않으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창조적인 상상력이 발휘되는 대표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p84-86

 /실용주의/이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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