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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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by 편린


나는 독자와 모든 새로운 글 사이에 개입하여 알게 모르게 독서를 가공하는 이 신화적이고 집단적인 비개인적인 표상들 전체를 '내면의 책'으로 부르고자 한다. 이 가상의 책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필터처럼 기능하면서, 어떤 요소들을 간직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서 새로운 텍스틀의 수용을 결정짓는다. /p118

우리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전설들과 각 개인 특유의 환상들로 짜인 이 개인적인 내면의 책은 우리의 독서 욕망 속에, 다시 말해서 우리가 책을 구하고 읽는 그 방식 속에 작용한다. 이 내면의 책은 독자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는 환상적 대상이다. 독자가 생을 통해 만나게 될 최고의 책들이란 단지 책 읽기를 계속하도록 그를 자극하는 이 내면의 책의 불완전한 조각들에 불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작가가 하는 일이란 바로 자기만의 이 내면의 책을 추구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자신이 마주치는 책들이나 자기 자신이 쓴 책들 - 아무리 완성도가 높다 할지라도 - 에 대해서도 언제나 불만족스러워 하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부단히 추구하고 다가가지만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완벽한 -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부합하는 - 책에 대한 그러한 이상적 이미지가 없다면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고 또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겠는가?

집단적 내면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내면의 책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수용하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며,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물론 재구성하는 데도 개입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내면의 책들은 세계를, 특히 책들을 읽는 하나의 틀을 구성한다. 투명성의 환상을 주면서 사실은 그것들의 발견을 설계하는 것이다. /p121

지금 우리는 어떤 책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해서 - 금테 안경을 쓴 미학자가 믿는 것과는 달리 - 참과 거짓이라는 개념이 그 유효성을 대부분 상실하는 공간으로 통하게 되는지 보고 있다. 독서라는 것은 기억의 점진적인 소멸이 이루어지는 장이므로, 우선은 우리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는지 어떤지 안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수 있으려면 우선 우리 자신이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뭔가가 거기에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는 한, 텍스트의 내용이란 것은 모호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책에 관한 담론의 잠재적 공간은 대단히 불분명하다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담론을 나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그들이 무엇을 읽었는지 엄밀하게 말하기가 어려우니) 담론의 유동적 대상과도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불분명함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잠재적 도서관의 거주자들이 자신들의 기회를 포착하여 그것을 진정한 가공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용할 줄만 안다면 그런 불분명함은 여러가지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책에 관해 우리가 나누는 교환들로 이루어진 이 잠재적 도서관이 허구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은 경멸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도서관의 자료들이 관내 거주자들에 의해 존중되기만 한다면 그러한 점은 사실 독창적인 창조의 한 형태를 조장할 수도 있다. 이 창조는 어떤 책에 대한 환기가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떠올리는 메아리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뒤섞인 그 메아리들을 바탕으로 하여 비(非)독자들이 처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책은 원본(이는 정확히 어떤 책일까?)과 거의 상관이 없는 어떤 책이겠지만, 여러 내면 책들의 가정적(假定的)접점에 가능한 한 가장 근접한 책이기도 하다.  /p209-210

어쨌든 작품은 담론 속에서 증발하면서 어떤 덧없는 환각적 오브제에 자기 자리를 내어준다. 다시 말하면, 온갖 심리적 투사(投射)를 유인하기 쉽고 사람들의 견해 표명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령 작품'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작품을 자기 탐구의 매체로 사용하고, 이용 가능한 그 몇 안 되는 요소들에 입각하여 그 요소들이 대체 불가능한 내밀한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해주는 바에 유의하면서 자신의 내면 책의 부분 원고들을 편찬하고자 하는 편이 더 낫다. 요컨대 우리는 "실재"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 - 물론 실재 책은 모티브의 계기로 쓰일 수 있다 -, 이 일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유념하면서 자기를 서술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p230

 /읽지않은책에대해말하는법/피에르바야르/김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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