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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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프롤레타리아여 안녕_사회주의를 넘어서 by 편린


1. 역사적 주체의 죽음과 부활

스스로를 노동에 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계급적 소속감이 사라졌다. 노동이 개인에 대해 왜재한 채로 남아 있는 것처럼, 그의 계급-존재도 개인에 대해 왜재한 채로 남아 있다. ...(중략)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 가운데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을 위해 권력을 정복하는 일은 더 이 상 문제가 인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본성.내용.필요성.방식들을 부정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p107-108

그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이제 특혜받은 소수층일 뿐이다. 인구의 대다수가 후기산업사회의 신프롤레타리아에 속한다. 이 신프롤레타리아는 불안정한 지위의 보조직.기간직.구(舊)기술의 노동직.대체직.파트타임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 마르크스의 프롤레테르와 달리, 신프롤레테르는 더 이상 "자신의" 노동에 근거해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 신프롤레테르의 존재는 생산의 사회과정에서의 지위를 통해서도 정의될 수 없다. ...(중략) 그들에게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노동자들은 더 이상 생산관계를 매개로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사회의 전반에 자리한 생산기구가 "노동"을 만들어내고, 우연적이고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인들에게 우연적인 형식으로 그 노동을 강요한다. 달리 말해, 노동은 이를 수행하는 개인들에게 속하는 것도 그 개인들의 고유한 행위도 아니다. 노동은 사회적 생산기구에 속하고, 그 기구에 의해 분배되고 프로그램화되고, 그 기구로부터 노동을 강요당하는 개인들에 대해 왜재한 채로 남는다. ...(중략) 젊은 마르크스가 모든 특수한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보편적 가능성을 그 안에서 보았던 프롤레테르는 오늘날에는 기구들의 보편화된 능력에 대항하는 특수한 개인성일 뿐이다. /p110-114

후기산업사회 프롤레타리아의 특수성은 지금껏 언급한 내용에서 파생한다. 전통적인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계급은 해방된 주관성다. 산업사회의 프롤레타리아가 재료를 변형시키는 능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모든 사회적 발전의 기반인 물적 능력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어 주던 객관적 권력을 이끌어낸 반면,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는 객관적인 사회적 중요성을 결여한, 사회로부터 배제된 비능력이다. 사회의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그들은 마치 낯선 과정과 공연을 대하듯 자신의 미래를 대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사회가 축소된 것으로 보이는 기구들의 질서를 점유하는 일도, 무엇이든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일도 의미를 결여한다. ...(중략) 후기산업사회의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는 이렇게 미래사회에 대한 전체적 구상을 결여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따를 때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던 그 계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신프롤레테르는 현 사회로부터, 이 사회의 발전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더 이상 알 필요도 없고, 역사발전의 내재적 법칙들을 열심히 따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도 향해 가고 있지 않다. '역사'는 으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으로부터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선험적 '동기',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을 보상해주고, 우리가 포기했던 일들에 대한 대가로 이자를 주며 변상해줄 것이라는 선험적 '동기'에 더 이상 우리를 헌신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중략) 물적 과정으로부터는 결코 자유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자유의 시대는 각 개인이 자유가 절대적 주관성임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유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일이 정립될 때만 시작될 수 있다. 비생산자들의 비계급만이 이 일을 정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계급만이, 생산주의를 넘어선 곳에서, 축적의 윤리가 거부되고 모든 계급이 해체되는 일을 동시에 육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p116-119

2. 후기산업사회의 혁명

후기산업사회의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강점이자 약점은 그들이 앞으로 올 사회에 대한 전체적 구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계급의 응집과 지속적 행위는 어떤 메시아주의나 포괄적 이론과도 관련이 없다. 다만 수많은 변화하는 개인들만이 있을 뿐인데, 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 어떤 세계를 만들기 위해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생산주의적이고 상업적인 합리성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탈취하여 각자의 삶에 대해 권력을 되찾는 것이다. /p120

오늘날의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각 개인들에 대해 이들이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협력해 생겨난 바라던 대로의 결물과처럼 보일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그리고 이 사회를 넘어 세계적 질서)를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생활.노동의 공동체와 전체적으로 바라본 사회 사이에는 단지 규모의 차이뿐 아니라 본질적 특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공동체는 각 개인이 공동체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 응집을 위해 노력하며 모든 주의를 기울여 타인들과 협력하고, 갈등을 경험하고, 감정적 관계를 맺는 과정을 통해 유지되고 매우 의식적으로 창조될 수 있다. 반면에 전체적으로 바라본 사회는 제도적 조직, 커뮤니케이션.생산 기반시설, 직무의 지역적.사회적 분할에 의해 생겨난 견고한 관계들의 시스템이고, 그것들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들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사회의 연속성과 기능을 보장하는 것은 그 시스템의 부동성이다. 따라서 구조화된 시스템으로서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구성원들에 대해 왜재한다. 이 사회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협력의 산물이 아니다. 각 개인은 자발적으로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고, 대신 사회의 부동하는 요구사항들에 따르고, 사회가 통합적기능을 위해 사전에 결정한 일자리.역할.자격조건.노동환경.위계관계에 스스로를 맞추며 사회를 만들어낸다. /p122-123

사실 선진국들 대부분 국민들이 "집산주의(collectivisme)"와 전체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그 "자유"는 근본적으로, 각 개인이 모든 사회적 압력과 의무로부터 피해 사적 삶을 영위할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중략) 이런 공간은 이윤창출의 원칙, 공격성, 경쟁, 위계적 훈련 등의 규칙에 지배되어 있는 세상에 대항해 정복한(혹은 정복해야 할) 독립성의 공간을 상징한다. 자본주의가 정치적인 안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개인들이 노동에서 경험하는 박탈감과 점차 거치는 제약들에 대한 대가로 노동의 영역 바깥에서 개인적 독립성의 영역을 만들 가능성을 제공받는다는 사실에서 오고, 이 독립성의 영역은 명백히 차츰 커지는 경향이다. ...(중략) 간단히 말해, 바로 삶의 결을 구성하면서 정당하게 삶에서 종속적 위치가 아닌 가장 우선의 위치를 차지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중략) 경제적 목표를 둔 사회적 노동이 개인적 자율성의 영역을 넓히는데-곧 자유시간을 확장하는 데-이바지 해야한다는 사상은 이미 마르크스에게서 중점적으로 나타났다. ...(중략) 이런 이유에서, 후기산업사회의 좌파가 최우선적으로 할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보상인 자율적 활동들을 가정에서, 특히 가정 밖에서 최대한 확장하고, 제3자(비록 이 제3자가 국가라 할지라도)를 위해 임금을 받고 수행해야 하는 상업적 활동들을 가능한 최대한 축소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노동시간의 축소는 필요조건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충분조건이 아니다. 만일 해방된 시간이 매스미디어가 만든 오락프로그램들을 시청하거나, 현실의 여러 일들을 잊게끔 만들어주는 상품들에 빠져들거나, 사적 영역의 고독 속으로 침잠하는 일로 그럭저럭 채워지고 대신 "여가"가 부재한다면, 노동시간의 축소는 개인적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하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p128-141

3. 이원론적 사회를 위하여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존재와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기란 불가능하고, 또한 그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개인적 실존의 모든 차원을 통합하기도 불가능하다. 개인적 실존은 완전하게 사회화될 수 없다. 그 실존에는 본질적으로 내밀하고, 개인적이고, 직접적이고(곧 매개하기가 불가능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공유의 것이 결코 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애정, 사랑, 미학적 창조와 즐거음(혹은 환희), 고통, 사별의 슬픔, 고뇌를 사회화 할 수는 없다. 그 역의 과정도 진실이다. (개인들의 활동이 자연적 법칙을 따라 이루어지는) 공동의 물질적 공간 내에 개인들이 서로 공존한다는 사실에서 필연성의 일들이 생겨날 때, 이 일들을 개인화 할 수는 없다. /p144

도덕적 의식을 갖는 것의 의미는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내가 이것을 원할 수 있을까?" 다시말해, 내가 방법적 측면에서나 결과적 측면에서 스스로 그 행위를 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행동하면서 "바로 나야. 내가 이것을 이렇게 하기로 원했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객관적 도덕성"의 특성은 개인들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하지 않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개인들에게는-사람들은 그런 개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신시킨다-탐구할 것도 의심할 것도 없다. ...(중략) 개인이 불가피성.알리바이.변명 없이 스스로의 행위의 주체적 주인이 되는 자율적 영역이 존재할 때만, 그리고 각자가 스스로를 창조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창조하는 일에서 그 자율적 활동의 영역이 하위에 있지 않고 상위에 있을 때만, 도덕성과 관계들의 도덕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자율성의 영역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149-151

그런데 도덕화 때문에 타율성의 영역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화는 단지 그 영역이 자율성의 영역에 종속되기를 요구한다. ...(중략) 이런 사실은 이미 마르크스가 직관적으로 간파한 내용으로, '자본' 3권의 끝에서 그는 "필연성의 영역"(곧 타율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곳에서만 "자유의 영역"(곧 자율성의 영역)이 시작될 수 있고, 그 필연성의 영역을 축소는 할 수 하지만 대신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던언했다. 우리는 바로 필연성의 영역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 영역에 한 자리를 내주며, 이 자리가 필연성의 영역이 될 수 있는 도잇에 그 영역이 자신의 합리성으로 전 개인적 활동들을 지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한도 내로 그 자리를 축소하려 한다. ...(중략) 간단히 말해, 불연속적인 사회공간을 조직하는 일을 통해 이원론적 해결책을 마련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공간에는 두 가지 구별되는 영역, 그리고 이 두 영역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특징지워진 생활이 포함될 것이다. /p152-154

오늘날에는 이 이원론적 개념만이 현실적이고 적용가능하다. 사실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각자에게 요구되는 노동시간을 대폭 축소하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각 노동을 이 노동을 완성하는 사람들에 대해 만족감을 주고 인격을 완성하는 수단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한다. 자율생산과 자율학습을 촉진하고, 현재 기업이나 관료적인 행정기구에 의해 제공되는 서비스의 일부분을 상호공제.협업.공동화(共同化)로 대체하면서, 자율적이고 노동자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관리되고 비상업적이고 그 자체로 목적을 지닌 활동들의 장을 넓히는 일은 가능한다. 하지만 노동자가 생산의 전 사회적 과정, 심지어 그 과정의 한 부분인 커다란 생산조직들을 자주관리하는 일은 불가능한다. ...(중략) 이런 이유로 타율적 노동을 폐기할 수 없다. 단지 그 생산품의 성격과 생산방식을 이용해 타율적인 노동으로 하여금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하는데 이바지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첫째, 타율적인 노동이 나은 성능을 갖춘 동시에 친근한 도구들을 자율적인 섹터에 최대한으로 제공하고, 둘재, 각자의 타율적인 노동시간이 최소한으로 줄어든다면, 타율적인 노동은 그만큼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하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두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화된 생산 섹터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 /p158-163

사람은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을 교대로 수행하지 않는 한 소진된다. 다른 모든 활동을 배제한 채 타율적 노동을 온종일 수행할 때 그렇고, 이것은 자율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중략)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불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 /p168

4. 필연성의 영역과 국가

필연성의 영역에는 두 유형의 타율적 활동이 포함된다. 하나는 필요한 것을 사회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요구되는 활동, 다른 하나는 사회가 물적 시스템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요구되는 활동이다. ...(중략) 생산기구는 기능하기 위해 상당한 크기의 행정.공공서비스 기구(국가기구)를 필요로 하고, 이 기구의 중개를 통해 사회를 외재적 관계들의 시스템으로 변환시킨다. 이 시스템에 대해 개인들은 행위자-주체인 대상 대신-피행위자, 곧 행정의 대상이다. 국가를 위해 사회의 중요성이 축소되고, 기술적 필요를 위해 선택의 여지, 자유, 정치적 권한이 축소된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물적으로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량만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일은 또한 직접적인 생산이 필요로 하는 외부의 비경제 시스템과 국가의 활동들을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축소는 생산기구 자체와 이 생산기구가 결정하는 노동의 분할이 조정될 대만 가능하다. /p169-170

그렇기 때문에 객과적 필연성의 일들을 '법'의 형식으로 체계화하고 이 법의 적용을 엄격히 보장하는 (시민사회와 구별되는) 국가의 존재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중략) 행위를 규약화하고 규제하는 일은 모두 상호적인 인간관계의 자리에 (개인들이 사전에 규칙화된 메커니즘의 구성요소로 기능하는) 무(無)관계나 비인간적 관계까 들어서게끔 만든다.'기계'로서의-폰 푀르스터처럼 말한다면, 평범한 시스템으로서의-혹은 기계들의 집합체(공장들, 행정기관들, 원거리통신과 교통 네트워크들 등의 집합체)로서의 사회의 부동적인 요구사항들에서 그 무관계는 생겨난다. ...(중략) 필연성의 영역을 결정할 때 이러한 관계들의 평범화가 생존투쟁, 곧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리고(혹은) 필요한 물품을 독점하기 위해 개인들이나 집단들 간에 벌어지는 투쟁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중략) 마르크스가 이 내용을 이미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개인과 집단 전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결핍의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각자가 사회적으로 수행해야 할 노동량을 정할 능력이 있는 (중앙화된) 생산과 분배 섹터가 존재할 때, 필연성의 영역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명확히 경계가 선 영역이 되고, 이 영역 내에서는 대부분 평범화된 기술행위들이 수행되고, 이 영역 바깥에서는 완전한 자율성의 공간이 전개된다. ...(중략) 따라서 지역과 지방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는 중앙계획화를 통해 필연성의 영역을 평범화하지 않는다면, 자율성은 감소하고 지배의 영향력과 타율설이 증간한다. 역으로 사회의 평범화를 필연성의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한 계급의 지배를 철폐하는 대신 기구적 지배의 보편화라는 결과를 낳는다. ...(중략) 따라서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지배의 철폐다. '법'과 지배, 국가기구와 지배기구는 지금껏 항상 혼동되어 왔지만,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중략) 그 큰 규모 때문에 지배의 핵심수단들이 되는 다른 모든 도구나 기구들을 함게 축소하지 않는 한, 국가의 영역과 그 기구들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타율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로 연결되지 않는다. 국가는 이런 이중의 축소에서 필수불가결한 도구다. /p181-187

국가가 독자적으로 이런 모든 일 중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중략)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고 국가로 하여금 스스로의 목적에 이바지하게끔 만드는 사회가 그 결과를  위해 국가를 조직할 때만, 국가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과 행위를 평범화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국가의 변화는 사회가 변화하기 위한 한 조건이다. 그 변화는 사회가 변화하는 데 있어 다른 모든 것을 종속시켜며 달성해야 할 시간적으로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지배계급과 국가기구의 지배를 무력화하는 자율성의 공간들을 열어놓는 사회투쟁들이 사회 내에서 이미 활성화되어 있을때만, 국가는 사회에 대한 지배기구가 되지 않고, 이 결과 사회가 변화를 위해 스스로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도구가 될 것이다. 어떤 정치적 변화에 대해서든, 새로운 유형의 사회관계, 새로운 방식의 생산.연합.노동.소비를 정립하는 일이 첫 번째 조건이다. ...(중략) 그 운동을 실천하는 일만으로도 새로운 자유들이 태어날 자율성의 공간을 창조하고 확장시킬 수 있다. 반대로 그 운동을 실천하는 일만으로는 새로운 '법'과 국가의 토대를 마련할 수는 없다. ...(중략)이런 일들은 국가에 일임할 수도 운동을 통해서 실천할 수도 없다. 그 일들은 고유하게 정치영역에 속한다. 정치는 자율성 영역(시민사회 내에서는 운동을 통해 이 영역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따)의 성장과, (물적 시스템으로서의 사회가 기능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국가가 운영하는 필연성의 일 사이의 긴장이 자리하고 항상 갈등이 유발하는 중개의 공간이다. 정치는 사회가 생산활동을 전체적 과정으로 의식하고, 그 과정의 결과들을 다루고, 그 제약들을 통제하려 시도하는 특정한 공간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치는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혼동되지 않을 때만, 또한 시민사회의 증대하는 열망과 동일한 것으로 혼동되지 않을 때만, 제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정치는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기술적 필요 사이에, 주관성과 객관적인 제약들 사이에 위치하지만, 그중 어떤 것과도 동일시 되기를 피할 때만 중개.재고(再考).조정의 공간이 된다. ...(중략) 따라서 정치의 본질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의 기능은 권력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법제화하고, 그것에 수단과 목적들을 부여하고, 그것이 제 기능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p187-190

...(중략) 오늘날 우리는 '선한' 정부, '선한' 국가, '선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회는 그 조직화를 통해서는 결코 '선하게' 되지 않고 단지 그 조직화가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자율-조직화의, 자율성의, 협력의, 자발적 교환의 공간들에 의해서만 '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중략) 도덕은 필연성과 관계가 없이 존재하고, 필연성은 도덕과 관계가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 시스템의 운영을 결정하는 물리적 법칙들은 윤리적 규범들로 전환될 수 없고 윤리적 규범들은 물리적 법칙들로 전환될 수 없다는 사실. ...(중략) 정치는 도덕이 아니고 도덕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도덕적 욕구와 외재적 필연성이 대면하는 공간이다. ...(중략) 이 대면이 지속될 때만, 그리고 솔직한 모습으로 드러날 대만, 필연성의 영역에 최소한의 자리를, 자율성의 영역에 가능한 가장 많은 자리를 줄 수 있다. /p191-192

 /프롤레타리아여안녕/앙드레고르/이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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