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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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D에게 보낸 편지 by 편린


...쾌락이라는 건 상대에게서 가져오거나 상대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 덕에 알았습니다. 쾌락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또 상대가 자신을 내어주게 만드는 것이더군요.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 나는 여자와 두 시간만 같이 있어도 지루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상대도 내가 지루해한다는 걸 결국 눈치 채고 말더군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당신이 나를 다른 세상에 이르게 해준다는 사실에 난 사로잡혔습니다. /P13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로도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로 묶여 있다고 느낀 그 보이지 않는 인연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뼛속 깊이 서로 다른 존재라 해도, 뭔가 근본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난 느꼈습니다. 뭐랄까, 원초적 상처라고 할까요.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경험', 즉 불안의 경험 말입니다. 우리 둘의 경험의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 경험의 의미는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요. /P18

...글 쓰는 사람의 첫째 목적은 그가 쓰는 글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쓴다는 행위입니다. 쓴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라져서 결국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문학적 구상의 소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루는 '주제'에 대한 문제는 그 다음에야 제기되는 것입니다. 주제는 필요조건입니다. 글을 만들어 낼 때 부차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지요. 글을 쓸 수만 있게 해준다면 어떤 주제든 좋은 주제입니다. /P37

...더 나아가 당신은 이론 구축에 저항했고, 특히 통계에 반발했습니다. 통계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인 만큼 설득력이 없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니 이 '해석'이란, 통계가 지닌 권위를 받쳐주는 수학적 엄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는 거지요. 나는 내 생각을 구조화하기 위해 이론이 필요했고, 구조화되지 않은 생각은 항상 겸험주의와 무의미 속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다고 당신에게 반박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대답했지요. 이론이란 언제든 현실의 생동하는 복잡성을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이런 토론을 수십 번 했고, 나중엔 상대가 뭐라고 대답할지 미리 알 수 있게 되었지요. 논쟁은 결국 놀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P52-53

 /앙드레고르/D에게보낸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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